연중 제31주일

2023년 11월 4일

서울대교구 현대일 루도비코 신부

단풍이 들었습니다. 예년보다 단풍 색이 예쁘지 않다고들 하는데, 저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 단풍의 색으로 인해서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는데, 내 강론으로 얼마나 사람들이 마음이 달라질까? 단풍이 주는 감동이나 마음의 변화만큼 주고는 있는가? 라는 성찰을 했습니다. 고작 색채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작 색채’가 아닙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나뭇잎은 활동을 중단하고, 그래서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자기분해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자기분해의 과정 속에서 색이 변하고, 그것을 우리는 단풍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날이 추워지니깐 잎이 옷을 바꿔 입었구나 정도로 생각하지만, 나뭇잎 색의 변화는 곡기를 끊으며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변하는 것이지요. 죽음의 위험에 이르면서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는 그 아름다움은 어떤 다른 것도 그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가슴을 울리고, 감동을 주며, 그 감동이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 아름다움은, 그냥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한 강론, 화려한 옷에 비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문장, 럭셔리한 치장품으로 장식한 외모, 혹은 고위 공직자의 권력, 글쎄, 잠시의 감탄과 끌림, 약간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자기 성찰과 반성,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진정성만큼 아름다운 색채와 그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감동을 따라올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위선을 비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행동과 생활이 그들이 하는 말과 다름이 위선입니다. 그나마 하는 말이라도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넣을 수 있습니다. 입만 번지르르 한 정치인을 넣을 수 있겠습니다. 글쎄 그들은 그들의 말조차 예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회 저명인사들, 권력자들, 교수들도 포함해볼 수 있겠죠. 오늘날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주교, 사제, 수도자들도 사실 남들과 다른 옷을 입으며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며, 인사받기 좋아합니다. 그들의 행실이 얼마나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치장과 권력이 단풍보다 더 비싸고, 화려해보일지 모르겠지만, 단풍잎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 감탄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위선자들의 자리에 각자 자신을 넣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자기 성찰과 반성, 진정성,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나를 드러내려고 하였는가, 아니면 외적인 것에 더 치중하여 사람들에게 보이기 급급하였는가.

우리는 성소수자를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육우당 안토니오, 변희수 가브리엘라, 그리고 많은 성소수자 영혼들. 너무나 아름다운 단풍입니다.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아니 차가움 때문에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었고, 그 아름다움은 저와 여러분의 가슴 속에 남아 감동을 이끌어내고, 또 우리를 변하게 하였으며, 우리 사회를 조금씩 변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시대의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어느 누구와 비교하여도 더 아름다운 색감으로, 더 큰 울림의 감동으로 우리를 변하게 하고, 우리 사회를 변하게 하고 있습니다.

단풍이 낙엽이 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아니, 그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지지 않고 사시사철 각자의 색으로 아름답게 자연을 물들이면서 남아있도록 하는 숙제가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녹색잎을 가지고 있는 상록수가 노란 단풍의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에게 무어라 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아름답게 남아서 감동을 주는 그러한 우리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다짐하고 또 청해야 하는 것이, 지금 위령미사를 봉헌하면서 진정으로 ‘위령’, 성소수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