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9일
서울대교구 현대일 루도비코 신부
사순절은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부활로 가는 40일간의 여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된 땅을 향해서 이집트의 종살이를 벗어나 40년을 걸어갔고, 우리는 부활을 향해 매년 40일간 사순절을 지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4년 사순 담화를 통해서,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를 걸어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부활의 삶을 향해 사순시기를 지내는 하느님 민족인 우리를 잘 대조하여 오늘날 어떻게 이 사순시기를 지내야 하는지 잘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 비추어, 이 교황님의 담화문을 함께 나누며, 우리 엘라이 아르쿠스는 어떻게 사순시기를 보내야 할지 묵상하고 싶습니다.
교황님은 종살이에서 해방으로 가는 탈출은 추상적인 여정이 결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구체적으로 거행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시면서, 당신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반장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아픔과 설움을 보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함께 아파하고 울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저, 이웃사랑하고, 기도 열심히 해라는 추상적이고 뭉뚱거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어야 하며, 나그네 생활을 하는 이에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어야 하고,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어야 한다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전쟁을 벌입니다. 편하기 위해서 공기와 물을 오염시킵니다. 재해로 자녀를 잃고 우는 부모를 위로하는 것조차 정치적인 일인냥 몰아갑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 가톨릭 엘라이 아르쿠스는, 성소수자가 하느님 백성들 속에서조차 숨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며, 위로받지 못하는 이 현실을 바라보며, 그들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안타까워하면서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혐오세력의 무자비하고 무지, 무식한 발언과 행태들, 아무 생각 없이 교리만 따지며 비난하는 글로 인해 부서지는 마음과 흐르는 눈물을 그냥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과 탈출기가 보여주듯이, 진정한 해방은, 진정한 부활의 삶에는 싸움이 따른다고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할 때, 싸웠습니다. 이집트인들과 싸웠고, 머물고 싶은 유혹,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과 싸웠습니다. 예수님 역시 공생활에서 많은 유혹과 싸웠고, 종교권력과, 기득권과 싸웠습니다. 오늘 복음의 그 예수님의 형제라고 말씀하신, ‘가장 작은 이들 중 한 사람’, 대중에게 소외된 이들, 사회적 약자들, 성소수자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은 박수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시끄럽게 굴어’,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지’, ‘남들처럼 살어.’ 그런 말들과 싸워야 합니다. 혐오의 말들이나 타성에 젖은 삶과 여러 유혹, 나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돈이 최고라는 물질만능주의와도 싸워야 합니다. 내 안의 두려움과 머뭇거림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싸우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행동하는 것은 또한 멈춘다는 것도 의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도 안에서 멈추고, 사마리아인처럼 다친 형제나 자매가 있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의례를 치르기 위해, 혹은 정결례법에 어긋날까봐 다친 이를 보고도 멀리 지나쳐간 사제나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리나 교회법만을 따지며, 마음 아파하며 울고 있는 성소수자에게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며, 나는 깨끗하며 많은 것을 안다며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멈추어, 울음을 듣고, 함께 울어주고, 울음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다수의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함께 하시기에, 소수의 성적 지향, 다양한 성별정체성을 가진 이와도 함께 하신다는 것, 아니 소수이기에, 작은 목소리이기에 더 크게 들으신다는 것을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하느님 백성인 우리가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는,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기 위해서는 누가 굶주리고 목마른 이인지 발견하여야 합니다. 천천히 가야 합니다. 때로는 멈추어야 합니다. 상처받지 않을까 조심히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소수자와 함께 머무르는 그런 인권감수성은, 다른 많은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 하는 인권감수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감수성인 것이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물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나를 벗어나는 용기이기에, 회개의 용기이고, 그 때문에 사순이고, 출애굽의 시작이지만, 또한 그 순간이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부활이며, 진정한 해방의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광야는 언제 끝이 날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39년 광야 세월을 보내고, 와 드디어 내년엔 광야생활 끝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반대로,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마자, 이제 고생 끝, 행복시작이었을까요? 혐오세력이 사라지고, 혐오적 댓글이 없어지며, 교리가 바뀌고, 성당에서 혼인을 할 수 있을 때만이 부활의 완성이고, 해방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용기를 내어 함께 싸우며, 사랑으로 함께 머무는 그 순간이 사순이며 부활이라 생각합니다. 교황님이 인용한 말씀처럼 믿음과 사랑은 희망을 걸어가게 하고, 동시에 희망을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의 희망을 걸어가게 합시다. 우리의 희망을 앞으로 이끌어 봅시다.